LS5/9

GRAHAM LS5/9 스피커

좀 연륜이 있는 애호가라면 로저스라는 영국제 스피커 를 기억하실 것이다. 우리나라 오디오 제품의 중심지가 충 무로와 청계천 세운상가였던 그 시절에 고급 외제 오디오 시스템을 다루는 집이라면 으레 로저스 스피커가 한두 세 트쯤 전시되어 있었다. 그 중에서도 눈에 많이 띄던 스피 커가 로저스 LS5/9이었다.

그레이엄 오디오를 소개하면서 느닷없이 로저스 얘기가 왜 나오는지 궁금하시겠지만, 이 자리에서 소개하는 그레 이엄 오디오 LS5/9 또한 BBC의 라이선스를 받아 BBC의 엄격한 규격에 따라 만들어진 제품이기 때문이다.
아시다 시피 BBC는 지금까지 라디오/TV 방송에 관련된 수많은 규격을 발표해 왔는데, 여기에는 오디오 스피커도 포함되 어 있으며, 그 중에서도 전 세계에 가장 널리 보급된 스피 커가 로저스 LS5/9였다. 그러나 1947년에 짐 로저스가 설 립한 로저스는 1990년대에 한 홍콩 회사에 인수되어 버리 고 BBC와의 관계도 단절되었다. 이를테면 대가 끊긴 셈이 랄까.

그레이엄 오디오는 2011년에 잉글랜드 남부 데번 주의 뉴턴 애벗이라는 곳에서 설립되었고, 첫 작품으로 BBC 라 이선스를 받아 BBC 규격의 LS5/9를 내 놓았다. 원래 LS5/9는 공간 제약 등으로 인하여 이보다 먼저 설계한 3 웨이 스피커인 LS5/8을 설치하기 곤란한 경우에 대비하기 위하여 내 놓은 스튜디오 모니터이다. 그 결과 중량 14kg, 용적 1 세제곱 피트 (= 약 28리터) 정도인 콤팩트한 2웨이 스피커가 탄생했다.

그레이엄 오디오의 LS5/9는 BBC 규격에 따라 데릭 휴 즈가 새롭게 설계했다. 데릭 휴즈가 직접 출연하여 설계 과정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 와 있어서 흥미롭게 시청하였다.
트위터는 34mm 패브릭 돔으로 프랑스의 오닥스 제품이다(트위터는 로저스 시절 의 것과 같은 제품이다). 중/저음 스피커는 영국의 스피커 드라이버 유닛 전문 제조사인 볼트에서 납품 받는다. 볼트 는 또한 크로스오버도 제작하고 공급한다.

캐비닛은 9mm 두께의 자작나무 원목이고 티크 목재로 마감 처리하고 있다. 댐핑 제재는 암면(巖綿)을 사용하고 있는데, 그 이유는 과거 로저스에서 사용하던 역청 재질이 환경 친화성에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.
스피커의 감도는 87d B S P L (1m, 2.83V)이고, 주파수 특성은 50Hz~16kHz +/-3dB이며, 최대 출력은 두 대의 스피커 를 스테레오로 사용할 때 2m 거리에서 100dB 이상이며, 크로스오버 주파수는 2.4kHz이다. 모든 부품은 영국과 유 럽에서 조달했고, 조그만 전자 소자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품질만을 사용하였으며,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볼트를 포 함하는 금속재는 전부 스테인리스강을 사용하였고, 철저 한 수제품으로서 여러 단계의 품질 관리 과정을 거친다고 제조사는 자랑하고 있다. 그리고 제조사가 권장하는 앰프 출력은 50-200와트 수준이다.

이 스피커를 시청한 서울전자의 리스닝 룸에는 마침 옛 날의 로저스 LS5/9도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. 아주 자세히 관찰하지는 못했지만 겉보기에 두 스피커의 외관 치수는 거의 동일해 보였고, 캐비닛 재질도 흡사하였다. 다만 중/ 저음 스피커 콘지의 각도가 약간 깊어졌는데, 이것은 저음 을 살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짐작한다. 배플에 설치된 덕트의 위치도 조금 달라졌다.
아마도 새로 운 설계에서의 위상 밸런스를 잡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. 재미있는 것은 그릴의 부착 방법이다. 로저스는 속칭 찍찍 이라고 불리는 벨크로를 사용한 반면에, 그레이엄 오디오 는 네오디뮴 자석을 사용하고 있다. 그러고 보니, 언젠가 로저스 LS5/9 그릴의 벨크로가 완전히 고착되어 떼어 내 느라고 애를 먹었다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, 자석은 그런 문제는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.

그건 그렇고 시청 결과는? 이번 시청에서는 네임 오디오 의 NAC 252 프리앰프/NAP 300 파워 앰프/슈퍼 캡 DR 조합을 레퍼런스로 사용했다.
첫 인상은 이 스피커가 실용 주의적인 BBC의 설계를 잘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 이다. 음은 투명하고, 음조의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, 과장 이나 윤색 없이 디테일이 잘 전달되었다.
스테레오 이미지 도 음향 무대 안에서 정연하게 펼쳐져 어느 한 구석 흠잡 을 데가 없다. 무엇보다도 사람의 목소리와 그 부근의 주 파수에서의 음질이 탁월했다.

그러나 이만한 사이즈의 스 피커에서 깊은 저음을 기대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라는 느 낌이 든다. 그것은 위에 말한 주파수 특성에서도 (50Hz~16kHz +/-3dB) 알 수 있다. 물론 이 주파수를 벗어나면 전혀 재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, +/- 3dB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. 높은 쪽의 주파수 를 16kHz로 제한한 것은 낮은 주파수와의 균형을 위한 것 으로 보인다.

이번 시청에서 가장 흥미를 끈 음악은 역시 ‘나비 부인’ 의 아리아 ‘어떤 갠 날’이었다. 지면 부족으로 음반 정보를 소상하게 적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양해를 구하고 싶은데, 이 스피커는 소프라노의 자연스러운 음색이란 무엇인지 알 려 주었다.
모차르트의 ‘클라리넷 협주곡’도 목관 악기의 실재감을 적확하게 재현해 냈고, 하이든의 현악 4중주 ‘종 달새’ 역시 양호한 스테레오 이미지와 함께 균형 잡힌 각 악기의 디테일을 전해 주었다. 아쉬운 대목은 조금 전에 언급한 대로 저음의 깊이였지만, 시청 작업을 진행할수록 소리의 투명성, 음조 균형, 디테일, 스테레오 이미지 등과 같은 장점이 더 크게 다가왔다. 영국 회사답게 스피커의 존재 이유는 역시 음악 재생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 인하는 순간이었다.

리스닝 룸의 공간 제약 때문에, 혹은 그 밖의 이유로 작은 크기의 스피커를 원하는 애호가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스피커이다. 되살아난 작은 거인의 앞 으로의 활약이 기대된다.